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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드리는 예배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전통적인 찬송가는 진부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기독교를 접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친숙해지기 쉽지 않다는 것도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CCM은 일반적으로 강한 감정적 호소력을 발휘하면서 예배모임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생동감을 주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고, 예수님을 금방 만날 것과 같은 분위기를 매우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전달하는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청중들을 사로잡고 분위기를 만드는 기능적인 면에서 인기 유행가들과 비슷한 특성들을 나타내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감사와 감격에 빠져드는 것 자체가 예배라면 CCM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예배음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내용과 모습에 따라서 예배음악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CCM이나 전통적인 찬송가 중에 어느 것이 더 좋다고 주관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성서가 계시해 주는 예배의 형태와 특징들과 방법과 예배에서 드려져야 할 핵심요소들이 어떤 것인지 먼저 살펴보고, 그 후에 어떤 음악이 예배음악으로 합당한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 사람아 …….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6-8)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참 예배입니다. 예배(proskuneo)란 선택받고 구원받은 피조물인 인간들이 높으신 하나님께 “떨리는 마음으로 최대의 경의를 표시하는 행위”자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는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 섬기는 삶, 즉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아가페)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이는 실제적 삶으로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엄격하게 말하면 매일 매일의 생활이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찬송과 기도와 말씀 선포를 통하여, 지나간 한주일 동안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앞으로 맞이하게 될 한 주일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또한 동시에 믿고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내 생활과 연관이 없는 한, 아무리 폭발적인 감격 속에서 찬송 부르고 열렬히 부르짖고 열심을 다해 아멘으로 화답하며 설교를 들었어도, 그런 예배행위 자체만으로는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진정한 의미의 예배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엄숙한 예배의식”이나 “열정적 사랑표현”도 예배의 겉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말씀대로 사는 삶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단순히 종교적 의식(ritual)을 행하는 것은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동시에 감격적인 감정(emotion)의 표현만으로도 마찬가지로 영적인 예배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삶에 “형식”이나 “감정”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엄숙한 분위기 속에 형식적인 절차를 밟아가며 의식절차를 따르는 예전적 예배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열정적인 분위기에 의해서 진행되는 감정 주도적인 예배도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삶이 변화되고 성숙되는, 영적인 예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과거에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엄숙한 행위를 예배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았었던 것만큼 요사이는 “벅찬 감격에 빠지는 것” 자체를 바람직한 예배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데 있습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급선회를 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목회자는 정의하기를 “예배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말씀, 그분이 역사하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Worship is expressing our love to God for who he is, what he’s said, and what he’s doing.)”라고 했습니다. 본인의 근본 의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최대의 경의를 표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예배(proskuneo, showing reverence to God)라는 기존 개념을 “사랑을 표현하는 것(expressing our love)”이라고 해석하여 슬그머니 좀 더 자유분방하고 감상적인 방향으로 예배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개조한 것입니다. 원래 예수님께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라고 하신 말씀 중에 언급되는 “예배할 지니라(proskuneo)” 또는 신명기 말씀을 인용한 “경배드리다(proskuneo)”라는 말씀의 “proskuneo”는 히브리어로“두려워하다”라는 뜻인 yare'라는 말을 헬라어로 옮긴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실 때 사단에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proskuneo)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단을 물리치셨는데, 그 인용된 신명기 6장 13절 말씀에 나오는 “경배”라는 단어는 분명히“두려워하다”를 뜻하는 “yare'(fear)"로 구약 성경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죄를 지은 아담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다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하나님께 대답한 말에서 처음 쓰였습니다. 즉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엎드리어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랑과 기쁨뿐만 아니라 놀라움과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는 기존의 “두려움으로 경의를 표시하는” 전통적 예배의 틀을 깨고, 오직 사랑과 기쁨의 요소만을 남긴 “사랑을 표현하는”간편한 예배로 축소시켜 입맛에 맞게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은 예배시간에 십자가의 사랑을 직접 뜨겁게 느껴 보고, 감격을 맛보려고 애쓰면서, 마음을 울리는 감상적 사랑, 촉촉이 젖어 들어오는 고요와 은은함, 뛰고 싶을 만큼의 즐거움, 온갖 슬픔과 답답함을 다 털어놓은 후에 오는 홀가분함과 자유로움 같은 것들에 깊이깊이 빠져들어 주님께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을 예배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찬송을 부르며, 울고, 웃고, 손을 들고 주님께 외치고, 옆 사람들과 포옹하고, 성령이 임재한 것으로 믿고 잔잔한 음악적 분위기 속에서 주님께 속삭이고, 위로와 사랑과 용기를 주는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고 나옴으로 예배를 마치곤 합니다. 진한 감동이 오고 그 자리에 임재한 예수님을 만난 것 같은 감격을 느꼈거나, 죄를 고백하면서 곧이어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들거나, 예수님의 십자가 아픔이 그대로 느껴져서 눈물을 펑펑 쏟고 나오면서 은혜가 넘친 예배를 드린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랑의 표현”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스스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심령을 직통으로 보실 수밖에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일부러 보시려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계셔도 그냥 자연스럽게 우리의 심령이 들여다보인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냥 보이는 것이 겉모습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면 사랑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사람의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극진히 높이는 것 같아 보이는데 심령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므로 표현되는 것보다 심령상태, 신앙자세, 마음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들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내는 즉흥적인 사랑의 표현보다는 꾸밈없는 진실한 속마음과 순종하려 움직인 실질적인 삶의 흔적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들이 반드시 짚어봐야 할 문제는 인간이 품은 사랑하는 감정 느낌자체도 하나님께 드릴만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너무나 변하기 쉬운고로 믿을 만 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드릴만한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연인들 사이의 사랑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무색하게 할 만큼 서로 사랑하던 사람들이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목숨과 바꾸려 했던 그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면서 도리어 서로를 사랑했던 것만큼 미워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뜨레스디아스(Tres Dias) 집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집회에서 천사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참석자가 두 주일도 못되어 완전히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와 있는 것을 발견한 경험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습니다. 머리에 내려 쪼이는 강한 햇빛을 가려줄 박 넝쿨을 하나님이 준비해 주시자 “심히 기뻐했던” 요나가 바로 다음날 박 넝쿨을 시들게 만들자 하나님께 대하여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성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대들었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심히 기뻐했던" 감정은 하루도 제대로 못 갔습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와 같이 수시로 변하는 사랑의 감정을 바라고 계시겠습니까? 우리가 요나보다 나을 것이 정말로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또 언제나 요나와 같은 불완전한 감성능력의 소유자들인 것을 알아야 하고, 안다면 그 불완전하고 변화무쌍한 일시적인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 한다는 것은 신자답지 못한 태도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이 사회에서는 감정문제로 인하여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감정을 우상시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식은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 결혼에 회의를 심각하게 느끼게 되어 이혼을 하게 되기 까지도 되며, 느낌을 통하여 주고받는 육체적 감정적인 사랑을 아가페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동성애가 교회 내에까지 들어오고 있고 용납되는 형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감정이나 느낌자체도 하나님께 드릴만한 온전한 수준이 못됨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결심의 마음도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힘 있게” 말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목숨을 담보로 한 결의의 각오를 드렸을 때, 예수님이 들으시고 좋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배반 할 것을 미리 아신 주께서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염려 하신 것처럼 이런 결심이 하루도 가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실제로 예수를 부인하고야 말았습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정말로 드려야 할 것은 고조된 사랑의 감정이나 분위기 속에서 드려지는 감정적 결단이 아니라 실질적인 실천인 것입니다.

예배란 드리는 사람이 자기 혼자서 울고 웃다가 일방적으로 자기가 드리고 싶은 것들을 드리고 받고 싶은 것들을 받은 후 끝내고 나올 수 있는 간단한 행사가 아닙니다. 자녀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혹시 자녀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놀면서, 부모님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사랑한다는 말만하려하면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물론 부모는 자녀가 공부는 안 해도 부모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실하게 공부하는 것으로 부모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기 바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감격하고 좋아하고 확신을 얻고 일방적으로 끝내는 예배는 도리어 하나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빌므로 인하여 드디어 용서 받았다고 좋아하면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상당히 어리석은 분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자가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용서함의 확신만 얻고 아무렇지도 않게 또 다시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처럼 그런 잘못을 거듭해서 저지르는 것 보다는 (잠 26:11),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고 죄악에서 떠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바라는 소원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함 받았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에 성공적인 예배를 드린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를 빌기도 전부터 이미 용서해 주셨고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물론 늘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우리가 당연히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단순히 용서를 구하는 마음 정도가 아니라, 삶의 방향 자체를 하나님의 뜻대로 돌이키는 실질적인 “회개”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예배는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제부터는 더 이상 혼자서 감격하고 혼자서 결심하고 혼자서 확신 얻고 혼자서 예배를 잘 드린 것처럼 착각하고 나오는 일은 혹시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잘못된 것은 전혀 아니지만, 예수님이 받으셨던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는 것 자체를 하나님이 매번 받으시고 싶어 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 언제 “내가 십자가 질 때 얼마나 아팠는지 아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아픔을 거듭 되씹는 것 자체가 아니라 예배를 드린 후에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서 말씀대로 변화된 천국백성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시며 일터로 내어 보냈던 것입니다. 즉 죄사함과 부활을 좋아하고 감상만 할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맡겨진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고통을 예수께서 대신 당하신 줄 알았으면, 예수께서 보내는 곳에 가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남겨진 일들을 실제로 감당하는 것이 예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나타 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 베드로가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할 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고 실질적인 행동 지침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감정도 필요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합당한 행동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실제적인 삶과 관계없는 예수와의 만남이란 별반 의미가 없는 것이고, 실제적인 삶과 관계없는 예배도 마찬가지로 예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라고 알려진 요한 사도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라고 요한 1서 5장 3절에 말씀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이어 하나님의 명령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순종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확실히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 말씀대로 살 수 있다!” 이것입니다. 적어도 한 주간 동안 지낸 삶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에서, 원하시는 시간에, 원하시는 일을 했는지, 또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선택해 주신 은혜에 감사, 인도함을 받는 은혜에 감사, 깨달음에 대하여 감사, 잘못된 것들에 대한 회개, 맡겨주신 일에 대한 감사, 하나님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기쁨, 나의 삶을 정확하게 조명해 주고 지적해 주는 말씀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되고, 또한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살아갈 이유를 확인 받고, 방향을 조정하고, 사명감을 충전시키고, 성령님의 동행하심을 확인하면서 담대함과 용기와 믿음을 재확인 하고, 목숨을 다해 전진할 것을 각오하고 구체적 신앙실천계획과 행동지침들을 가지고 나오는 일이 예배 가운데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세  운  돌   2/17/2005 _________________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

Remove not the ancient landmark, which thy fathers have 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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