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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예배에 관하여 여러 가지 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란 의식(ritual)도 아니고 단순히 사랑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 하셨을
것입니다. 즉 예배란 우리의 인생 자체를
드리는 행위라는 점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그러한 예배를 드리기에 적합한 음악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반찬을 먹고 싶으면 일반적으로 숟가락보다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좋고, 반면에 국을 먹고 싶으면 숟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적합 합니다. 막노동을 하려 하면 양복보다는 작업복이 좋지만, 결혼식의 하객으로 참석할 사람은 작업복보다 양복을 입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적합한지의 여부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배와 음악도 마찬가지의
관계입니다. “CCM이 어때서요? 찬송가도 문제가 많습니다! CCM이 더 좋아요! 찬송가가 과거에는 CCM이었습니다!”와 같은 CCM이나 찬송가 자체만을 보고 판단하려는 편협해지기 쉬운 미시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곡조나 가사가 듣기에 좋다는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예배음악은 예배에 합당한지 안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합당한 예배 음악은 현실적이어야 하고, 누구나 부를 수 있을 만큼은 쉽고 보편적이어야 하고, 세대차이나 지역차이나 문화차이를 넘어서서 하나로 묶을 수 있어야 하고,
성령께서 쓰시고자하는 뜻이 담긴 음악이어야 하고, 교회 음악다운 거룩한 특성들이 곡조와 가사에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음악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즉 대부분의 예배 참여자들이 함께 부를 수 있을 만큼 쉽고 일반적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드려야만 하는 예배에서 누구는 부를 수 있고 누구는 어려워서 못 부른다면 예배 음악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찬송가를 예배음악으로 사용해야 할 이유 중의 하나가 보편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는 CCM이 찬송가보다 더 부르기 쉽고, 더 보편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CCM은 음악적 성향의 차이와 세대차이로 인하여 보편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CCM으로 인하여 젊은 세대와 노년층이 함께 부를 공통적 예배음악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분들은 별로 없으실 것입니다. 즉 함께 부를 노래가 없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CCM의 경우는 거의 젊은이들을 위한, 젊은이들에
의한, 젊은이의 곡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한 말일 것입니다. 이 말은 나이가 많은 분들은 따라 부르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Offbeat이나 Syncopation이나 Anticipation같은 엇박자의 리듬을 사용하여 탄력이나 속도감을 주는 곡들이 매우 많기 때문에 빠른 음악을 따라할만한 능력이 없으신 분들에게나 또는 정박자의 음악에 익숙해진 분들에게는 박자에 맞추어 따라 부르는 것 자체가 힘들고, 그 외에도 록이나 힙합 등등 여러 가지 대중음악의 특징들을 많이 적용시킨 CCM인 경우, 젊은이들은 좋아하지만, 나이 많으신 분들은
요란하고 정신없고 찬양인지 아닌지가 구분이 안 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CCM은 세대와 세대를 가르고, 선배와 후배를 가르고, 고전과 현대를 가르고, 전공과 비전공을 가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배자들의 성향이나 수준에 따라서 뿔뿔이 흩으러 나눌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의 어떤 유명한 대형 교회에서는 예배음악의 종류에 따라서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 예배를 드리는 형태로까지 “진화”되었습니다. 세대를 가르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취미와 성향에 따라 나누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향으로
변형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도 아닌 교회의 예배 음악이 교회 안에서 부모와 자녀를 세대차이로 갈라놓고, 조부모와 부모를 갈라놓고, 자녀와 자녀를 취미와 음악적 성향에 따라서 갈라놓는다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함께 예배드리기 원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노골적으로 동원하면서, 지상에서 천국의 맛을 볼 수 있고, 천국의 모습을 갖고 있는 가정들은 도리어 “뿔뿔이 흩어놓고” 무슨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뿔뿔이 흩어져 각자 드린 예배가 도대체 신자들과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리 흩어져
있었더라도 주일날 예배 시간에 한곳에 모여서 한마음으로 한 아버지께 찬송과 경배를 드리는 것이 정상이 아닙니까? 왜 흩어지는 방향을 일부러 택하십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에 오도록 만들어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가정을 하나로 만드는 중대한 사명을 등한시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왜 믿음의 가정에 속한 자녀들을 희생시키십니까? 흩어지는 것이 당연시 된다면 가정은 어떻게 되는 것이며 부모와 떨어져 고아들처럼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는 신자들의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지금이라도 교회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배는 예배답게 드려야합니다. 교회가 가정을 세워주지 못하고 교회의 덩치를 키우는 데만 탐닉한다면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에는 우선순위를 지켜야 합니다. CCM을 부르며 세상 사람들과 함께 앉기 위해서 애쓰기 전에, 우선적으로 찬송가를 부르면서 온 가족들이 함께 앉을 수 있도록 방향을 바로 설정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예배만 드리면 다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직 신앙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자녀는 젊은이들이 모인 장소에서 예배드리고 젊은이들의 음악으로 젊은이들을 향한 메시지를 듣고 부모는 어른들의 모임에 가서 나름대로의 메시지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서야 합쳐지는 경우 가정이 하나로
연합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공통으로 부를 수 있는 찬송가가 있을 때, 부모는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수시켜 줄 뿐만 아니라, 교회에 다닐 수 있도록 예배 문화도 가르쳐주면서 신앙생활 자체를 전수시켜 줄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될 때, 부모가 이 땅을 떠나게 되더라도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을 계속적으로 공급해 주는 교회와 자녀의 심령을 항상 감찰하시는 성령께 맡길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신앙은 대대로 전수되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는 너무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곡들이기에 누구나 부를
수 있다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세대에 따라 다른 느낌이나 다른 분위기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부를 수 있고, 함께 깨달을 수 있고, 동일한 감동과 느낌을 받게 됩니다. 찬송가가 지겨울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무심코 그렇게 알고 계시던 분들이 있으시면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그렇게 지겹다면 어떻게 그렇게 지겨운 찬송가가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계속해서 세대에서 세대를 이어가며, 온갖 나라들과 모든 민족과 족속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면서 지금까지 불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겨울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겨움이 없는 곡들이기 때문에 어떤 곡은 수백 년이 흘렀는데도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면서 여전히 신자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전통적인 찬송가는 가족을 하나로 합쳐주는 반면, CCM은 가족들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하나가 되기 원한다면 전통적인 찬송가를 예배음악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만한 충분한 귀한 가치와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긍정적이고 신령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음악으로
CCM과 전통적인 찬송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전통적인 찬송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CCM은 세대와 가정을 갈라놓을 뿐만 아니라, 지역과 교회들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많은 CCM들이 계속해서 새로 만들어져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마다 서로 다른 CCM을 부르다보니 결국 같은 교회 교인끼리만 알고 다른 교회 교인들은 모르는 예배음악이 점점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개 교회들이
특색 있게 발전하는 것도 좋지만,
찬송이 달라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기에 어려울 정도가 되는 것은 곤란합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아무리 지역을 달리해도 같은 주님의 교회로 생각하고 서로 형제자매로 우의를 다지며 가까이 교제하며 서로 기도해 주던 초창기 기독교 역사를 생각하면 별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CCM과는 달리 전통적인 찬송가는 이와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참석해도 같은 성경을 읽는 것처럼, 전통적인 찬송은 교우들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합쳐 하나로 만들어 줍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도 찬송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교제할 수 있고, 형제자매가 될 수 있고, 한 아버지를 함께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음악으로 전통적인 찬송가를 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은 수의 사람들도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기 위해서도 전통적인 찬송가를 예배음악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모인 모임에서도 예배가 드려질 수 있어야 합니다. CCM을 예배 음악으로 사용하는 경우 소규모 집회를 가지기
어려워집니다. 왜냐하면 CCM은 분위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CCM인 경우 많은 사람들이 부를 때와 적은 수의 사람들이 부를 때와 감동의 편차가 상당히 큽니다. 소규모의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CCM을 불러도 썰렁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는 반면에 사람들이 많으면 절로 신이 나게 되어 있고, 더 자신 있게 소리를 내게 되고, 덩달아 분위기가 더 고조되고, 분위기에 이끌리어 감격스러움을 느끼며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더구나 CCM은 현대의 전자 악기들이 등장하여 효과를 훨씬 더 극대화 하도록 되어 있는 음악들이 많기 때문에, 온갖 전자 악기들과 최신 음향기기들이 등장하고 또한
그런 악기와 기계들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아는 전문가들이 모인 대규모 집회에서는 더 진한 감동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대규모 집회의 맛을 본 사람들은 대규모 집회를 더욱 선호하게 되어 두 세 사람이 모인 작은 집회는 예배처럼 느껴질 수가 없게 되는 것이고, 결국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소규모 모임은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람직한 발전 방향이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이런 경향이 성서적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만약 두 세 사람이 모인 예배가 등한시 된다면
가정에서의 예배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가장 대표적인 예배 장소가 바로 정확하게 가정인데, CCM을 예배음악으로 사용하다보면 결과적으로 가정예배를 비롯한 소규모 모임은 어색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회의 규모에 관계없이, 악기가 있건 없건 관계없이, 많건 적건 관계없이 항상 언제 어디서나 예배 음악이 될 수 있는 전통적인 찬송가를 예배음악으로 사용하는 것이 교회와 가정을 위해서 지혜로운 선택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섬기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CCM 곡조의 근간이 되는 대중음악의 곡조들은 대체적으로 대중의 마음을 알아주고 표현해 주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지, 바로잡고 변화시키고 극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위로해
주고 마음을 가볍게 해 주고 감상에 젖게
만들기도 하고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CCM은 모임 장소로 사람을 이끌어 오고 감격과 환희로 뒤덮거나 감상에 깊게 젖은 집회 분위기를 만들기에는 적합하지만, 실질적인 생활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제어하도록 만들어 주는 데는 그다지 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신자답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롭지만 엄하신 사랑의 하나님”보다는 단순히 “무조건 좋으신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CCM을 부르는 가운데, 죄악 속에 살고 있음을
고백하면서도 죄로부터 떠나기를 미루도록 만들어 주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삶이 바뀌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잘못된 방향으로 안심하도록 만들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고, 죄악 속에 사는 자들을 너무 불쌍히 여기셔서 죄인들을 책망조차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안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하고, 아무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기에 결국은 하나님이 어쨌든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주고, 성결에 대한 의지나 노력이 없더라도, 또 죄를 아무리 반복해서 범하더라도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리라는 “값싼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여 주기도 하기 때문에 결국은 반드시 있어야 할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도리어 방해하기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 시간에 죄에 대한 고백과 용서함 받음에 대한 환희와 눈물과 감격과 열정적 감정이 일어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일면만 보고 CCM을 예배음악으로 택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오순절 모임에서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시면서 일어났던 일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을 하게 되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혀를 주장하심으로 하나님이 각 사람의 주인 되심을 확증하시면서 교회의 첫 번 오순절 예배를 받으셨던 것처럼, 예배에서 드려지는
노래도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자의로
택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불러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입술을 하나님께 드려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시는 가사와 곡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즉 예배에서 드려지는 찬송에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과 뜻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더불어 알아야 할 것은 찬송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최고 최선의 것을 주고 싶으시기 때문에 부르라고 하시는 것이지, 단순히 인간들의 노래를 듣고 싶으셔서 부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은혜 베풀기를 원하시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급하고
아름다운 축복들을 주시기 원하는 하나님께서 때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듣기 원하시는 곡과 가사가 있기에 찬송을 부르라고 권고하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결과적으로 예배에 합당한 찬송은 우리가 원하는 내용과 느끼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듣고 싶어 하시는 가사와 우리가 부르기를 원하시는 곡조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이북에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시고 남한으로 피난을 오신 어떤 목사님께서 청년 때에 이북에서 친구와 함께 탄광으로 끌려가게 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일이면 끌려가서 살아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는 길을 떠나야 되는 상황에서 소집명령을 함께 받은 친구와 둘이서 교회에 가서 밤새도록 기도하다가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라는 찬송을 부르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그 찬송가의 3절 마지막에는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가사가 있는데 찬송을 부르면서 옆에서 함께 기도하며 함께 찬송을 부르던 친구가 3절 마지막 부분은 부르지 않고 매번 입을 다물곤 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궁금해서 “왜 3절 마지막부분을 함께 부르지 않느냐”고 묻자, 그 친구가 대답하길
“나는 꼭 살아야 하기 때문에 부르고 싶지 않았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물론 죽기를 정말로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가사를 부른 사람이나 안 부르는 사람이나 죽고 싶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 다 죽음 앞에서는 떨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들입니다. 하지만 그 찬송 마지막 부분을 부른 사람과 안 부른 사람은 결과가 달라집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를 안 부른 사람은 찬송과 기도가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여전히 죽음 앞에서 떨 수밖에 없는
연약한 상태로 여전히 남아 있게 되지만, 찬송을 온전히 부른 사람은 처음에는 떨렸을지라도, 찬송과 기도가 끝나고 돌아 갈 때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김으로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아 담대하고 평안한 마음을 선물로 받고 성령님의 직접적인 도움과 인도하심을 받게 됨으로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처럼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의 역할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안타까운 심정대로라면 “주여! 무조건 살려 주소서!”라고 외치고 싶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임을 알기에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과 믿음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고 승리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살기 원한다면 살려 달라고 외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목숨을 하나님께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일단은 목숨을 하나님께 맡겨야 살려주시는 역사를 행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라면 목숨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당연한 것이고, 나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해주고 싶으셔서 하나님은 “내 주여 뜻대로”라는 찬송가를 부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을 노래하게 해주고, 내가 이루고 싶은 소원을 노래하게 해 주고, 내 심정을 알아주고, 위로해 주고, 평안하게 만들어주는 노래보다는 내 마음에 내키고 안 내키고를 떠나서 마땅히 고백하고 선포하고 인정해야 할 내용들, 즉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시는 곡조와 가사를 담은 노래가 예배 음악으로 더 합당한 것입니다.
하늘을 난다고 다 똑 같은 비행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여행할 때는 수송기를 타지 않고 여객기를 탑니다. 왜냐하면 수송기는 짐을 실어 나르는 비행기이기 때문에 사람이 타고 여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음악도 마찬가지로 적합성 여부로 판단해야 합니다. 좋고 나쁨보다는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생겨난
노래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좋은 곡과
가사로 된 노래들은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예배음악으로 적당한지 안한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CCM들 중에는 음악적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좋은 곡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음악적인 면으로 볼 때, CCM에 비교하면, 전통적인 찬송가는 좀 시대적 감각과 대중적 감각이 뒤떨어지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뜻 진부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입술을 통하여 듣고 싶어 하시는 가사와 살펴보고 싶어 하시는 심령을 표현할 곡조를 담고 있다는 면에서 오히려 전통적인 찬송가가 예배음악으로서
훨씬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 음악”은 실생활과 연관이 있어야 합니다. 감정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즉 예배 음악은 생활 현장에서 체험을 통하여 만들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부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실질적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야 예배음악으로서의 필요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단순히 듣기 좋은 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명하는 영적 예배는 “실질적인 행함”이 밑바탕이 되어서 드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합당한 찬송은 예배의식(ritual)을 도와주는 장엄하고 엄숙한 음악이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마음을 감싸주고 어루만져 주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 만드는 가사와 곡조를 제공해 주는 감상적인 음악보다는 찬송 부르는 사람의 잘못된 점들을 고쳐주고, 하나님을 더 자세히 알도록 도와주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나게 만들어주고, 생활 현장에서 말씀대로 살도록 인내와 믿음과 도전의식으로
도와주기 위해서 성령께서 만들어 주신 음악이 예배에 합당한 음악이라고 할 수 있고, 예배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음악보다는 삶의 전반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배드리는 현장 상황뿐만 아니라, 예배드리기 전과 후의 상황에서도 신앙인으로써의 자세를 유지시켜주고 믿음의 길, 의로운 길, 십자가의 길, 은혜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밀어줄 음악이어야 예배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감성적 호소력이 강한 CCM보다는 시대와 환경의 계속적인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언제나 귀히
여김을 받으면서 실생활 속에서 꾸준히 그 가치와 능력을 점검받고 인정받아 전수되어온 전통적인 찬송가들이 예배 음악으로 더 합당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찬송가가 예배음악으로 적합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바로 “실질적인 삶의 현장”에서 영감을 받아 나온 가사와 곡조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찬송가사의 공통적인 특징들이 이런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CCM과 비교해 볼 때, 전통적인 찬송가의 가사들은 작사자들이 실제로 믿음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과정 가운데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드렸던
간구나 고백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CCM과 찬송가는 다릅니다. 그래서 CCM들은 성경말씀 자체를 그대로 가사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반면, 전통적인 찬송가들을 성경말씀을 따라 살면서 영감을 받아 깨달은 체험적 내용들이 가사인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찬송가는 일부러 만들려고 했다기보다는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탄생되게 된 음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전통적인 찬송가는 신령한 열매들을 맺어나가시는 성령께서 확실한 도구로 사용하신
증거가 새겨져 있는 곡들입니다. 음악적인 면들만으로 볼 때, 사실 전통적인 찬송가들은 지금까지 오랜 동안 전하여지고 불려야 할 이렇다할만한 특별한 특징들을 발견하기 힘든 곡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곡들이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성령의 도구임을 확실히 대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도구로 사용되어 온 신령한 노래들이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입니다. CCM처럼 감정적인 사랑이나 무조건적 위로나 포근함이나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요소들은
없지만, 미세한 소리 가운데 움직이시는 성령의 역사에 줄곧 도구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마다 전통적인 찬송가들이 함께 불러지곤 해왔던 것입니다. 적어도 어떤 시대나 어떤 장소에서도 실질적인 생활 현장에서 성령의 도구로 동일하게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찬송가에 수록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그런 연고로 지금도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는 힘”이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들어졌고 쓰임 받아 오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찬송가 470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은 성령의 강한
감동으로 탄생된 찬송입니다. 법의학을 강의했던 Spafford 교수는 시카고 대화재로 인하여 온 재산을 잃어버린 후 상심한 가족들을 위로해 주기 위하여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부인과 네 딸을 먼저 프랑스로 보냈으나 여행도중 배가 충돌하여 부인만 구조되고 네 딸은 익사하는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부인을 만나러 프랑스로 가는 도중 자신의 딸들이 익사한 비극의 현장을 지나고 있다는 선장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너무 괴로워서 밤새 몸부림을 치던 중 새벽 3시경에 성령께서 Spafford 교수의 마음을 붙잡아 주심으로 쓰라리고 아픈 마음이 온전히 평안한
마음으로 바뀌면서 솟아 나온 고백이 바로 “내 평생에 가는 길”이라는 찬송시였다고 합니다. 찬송가 473장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1930년대에 미국에 대 공황이 불어 닥쳤을 때, 남편과 재산을 다 잃고 슬픔에 잠긴 앤 머피 여사를 성령께서 붙잡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낙심을 극복하고 참된 평안을 갖게 해 주심으로 이 찬송가가 탄생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실질적인 생활의 현장에서 세상을 이기게 만드신 성령님의 눈물 자국과 땀자국과 손자국이 선명하게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성령님의
역사하는 힘이 진심으로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의 심령을 붙들어 강하게 만드시고 온전케 보호해 주시어서 세상을 이겨 승리하게 만드시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고 듣기 좋고 부르고 싶은 곡들만 골라서 예배 음악으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좀 시대에 뒤진 것 같아 보이고, 평범하게 들려도 생활의 현장에서 성령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전통적인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예배로 생각됩니다.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 거룩한 분위기를 위해서도 찬송가를 예배 음악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CCM을 교회 음악으로 사용하는 경우 음악 자체가 가진 가요풍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자연히 세상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악기들도 덩달아 교회에 들어와야 하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물론 기능이나 최신 음악적 기술을
더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겠지만, 죄악으로
물든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과 다른 거룩한 분위기를 찾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도 반드시 동시에 아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만들어 줌으로 좀 더 많은 세상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어 주겠다는 취지에서 본다면, 세상 사람들이 듣기에 친숙한 박자와 친숙한 리듬과 친숙한 율동, 그리고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온갖 세상적 이미지를 물씬 풍겨주는 악기들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반면에 세상과 확연히 구별되는 교회다운 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그 교회에 들어오는 순간 실망하거나 교회를 업신여기게 될 사람들도 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땅에 계시는 동안 매우 엄하게 경고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예수를 찾아서 나온 사람 하나가 혹시라도 실망하여 실족하게 된다면 교회의 책임이 큰 것입니다. 교회에 신나는 음악이 있다고 광고하고, 그 소문을 듣고 휩쓸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도 좋지만, 사실은 진리를
찾아 애쓰며 정말로 예수를 믿고 싶어 하는 “한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를 더 중요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다른 양 아흔 아홉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 살 길을 찾아 헤매는 한 사람을 홀대하면서, 죽고 사는 생명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아흔 아홉 명을 모아 놓고 사람이 많다고 자랑만 하고 있는 교회가 무슨 교회일 수 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교회나 믿는 가정 안에서 믿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그 진가가 인정되어져 왔고, 또 믿음의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양육시키는데 쓰임 받고 있는 전통적인 찬송가를 예배 음악으로 사용하여 어떤 환경이나 처지나 분위기 속에서도 교회가 교회다운 소리를 내고 영적인 정조를 지키며 거룩한 공간을 마련해 줌으로 세상에서 지친 영혼들이 들어와서 안심하고 쉬고 소생함을 얻고 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음악도 개혁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의 특징들 중의 하나가 개혁이고, 그 개혁(reformation)은 단순히 새롭게 만들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운동을 의미합니다. 세상적인 통념과는 정반대입니다. 혹시라도 진화시키는 것을 개혁으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CCM을 발전시키는 것이
개혁이 아니라,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더 개혁이라는 의미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그런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원래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들이 성경의 원리와 원칙으로부터 멋대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지침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선물로 받아 새 시대를 선도해야 할 책임을 진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위치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새 시대를
맞이하는 이 사회와 사회를 인도하는 교회가 잘못해서 하나님의 원리원칙으로부터 벗어나 타락의 길로 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소금의 역할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개혁인 것입니다. 요즈음의 기독교가 나아가는 방향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혹시나 너무 인간적인 목표를 가지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인간적인 열매를 거두면서 인간적인 잣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평가하고 인간적인 권위와 명예와 자랑에 빠져 있지나 않는지 염려 될 때가 많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개혁해야 할 점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개혁을 단행하는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세 운 돌
2/17/2005 _________________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
Remove not the ancient landmark, which thy fathers have set.
▶ 찬송가와 CCM, 새 노래란?
▶ 교육적 측면에서 본 찬송가와 CCM
▶ 복음전파는 CCM으로?
▶ 예배란?
▶ 찬양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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