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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는 신앙생활의 한 요소입니다.
”자식의 은혜를 아는 부모”라는 책은 일반적인 교양서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는 그냥 하나의 서적입니다. 그 안에 수록 되어 있는 ”이해하되 삶의 원칙에는 엄격한 부모”라는 칼럼도 기독교인들이 아닌 일반인들을 위한 칼럼으로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구태여 쓰는 이유는 저자가 목사님이시기 때문에 혹시나 기독교 서적이나 칼럼으로 오인될 소지가 있지 않을까 염려되어, 성경적 지침들이 어떠한지를 상기시켜드리려는 뜻에서 글을 쓰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더 확실히 알려 드리기 원합니다. 따라서 목사님이 쓰신 글이지만 기독교적이지 않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과 당연히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빠진 점들에 관하여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기독교인들의 외모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위의 저서가 2001년도의 출판물이어서 오래전에 쓰인 칼럼이지만, 끊임없이 유행을 타면서 변모해 가는 외모를 보는 시각과 핵심주제나
논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전도서 말씀대로 “이미 있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예수를 믿는 여러분들은 외모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지고 계십니까? 혹시 사무엘 선지자께서 말씀하신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또는 로마서에 기록된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라는 말씀들을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에 관심이 없으시고, 따라서 무슨 옷을 입던 무슨 장신구를 착용하던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성경말씀의 진의를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도 중요하게 생각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외모가 마음중심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외모가 신앙상태의 표출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옷이나 장신구와 같은 외모는 밖으로 표현된 마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외모는 선택의 결과물입니다. 사치와 허영으로 물든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할 수만
있으면 온갖 고가의 명품 옷들과 장신구들로 치장을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위선적 마음을 가졌던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인정받고 싶어서 일부러 경문을 남보다 크게 하고 술을 과장되게 길게 늘어뜨리는 복장을 했습니다. 외모를 보면서 그들의 사치스런 마음을 볼 수 있고, 외모를 통해서 위선적 중심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를 지엽이 아닌 본질의 문제로 보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외모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많은 경우 외모가 “중심을 반사시켜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2000년을 전후한 당시에는 남학생의 귀걸이 착용이 일반적인 패션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 대학청년의 귀걸이나 빨간 머리와 같은 외모는 주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려는 중심에서 선택한 외모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창 35:4 참조), 그냥 단순히 ‘자기가 하고 싶어서’ 했다고 하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고 싶어서 그냥 했다고 하더라도 그 외모로 인하여 마음 중심의 상태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렇다면 외모는 지엽말단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본질인 것입니다.
둘째로 신자의 외모는 불신자의 외모와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외모와 불신자의 외모를 구별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신자의 외모가 뜻하는 의미와 불신자의 외모가 뜻하는 의미는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불신자도
자신의 선택으로
외모를 결정하지만, 적어도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는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았기에 성령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신자의 외모는 신앙과는 무관한 반면 신자에게는 신앙과 관계되기 때문에 본질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외모는 마음속에서 결정되어 나오는 것인데, 신자의 마음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지시를 따라서 결정 되었을 수도 있고 성령님의 뜻이 무시되며 결정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쨌든지 밖으로 드러나 눈에 보이는 외모는 성령님
면전에서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외모는 경제상황이나 주위환경이나 당시의 유행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그 사람이 나타내보이고자하는 욕망이나 가리고 숨기려는 의도나 체면이나 자존심이나 사고방식이나 선호도나 문화감각이나 학문의 수준이나 미적 감각이나 가치관이나 성격이나 성품과 같은 여러 가지 속에 있는 요소들에 의해서 선택되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요소가 그 신자 안에 거하고 계신 예수님의 영, 곧 성령과의 관계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일예배의 출석여부로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교회출석 자체를 예수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확실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나가도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불신자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신자입니다. 즉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옷과 장신구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자는 반드시 구원주이시며 사랑이신 주님(Lord), 곧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옷을 입고 장신구를 착용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행동”입니다. 만약 예수를 믿는 청년이 세상 남성청년들의 귀걸이 착용이 멋있어 보여서, 세상의 유행대로 치장해보고 싶어서 세상 문화의 흐름을 따라서 옷을 입고 장신구를 걸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셋째로 외모가 신앙교육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청년들이 성장하는 가운데 잘 해나갈 때도 많지만 이런 저런 시험에 빠지기도 하고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언제든지 일시적으로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에 끌려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비정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원칙을 상기시켜주는 부모님’인 것이고 그때그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려줄 부모인 것입니다. 정말로 자녀들이 올바로 성장되게 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행동지침’들이 필요하고 그것들을 점검하고 지킬 것을 요구하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즉 “하나님의 법과 원칙”을 항상 상기시켜주고, 문제가 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지키라는 지침들을 지속적으로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글의 제목대로 “삶의 원칙”은
확실히 고수해야 되고 자녀들에게 법과 원칙을 그대로 전달해야 되는 것이 부모님의 의무이고 목사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외모든 간에 외모는 단순히 외모일 뿐이고 지엽말단이니 너무 부모님의 취향에 맞추라고 강요하지 말고, 젊은이들의 기분과 취향을 존중하고 받아주고 이해해 주면 자녀들도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권하는 것은 신앙교육을
올바로 시키려는
부모님들을 혼돈상태로 빠뜨리는 잘못된 안내판과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외모에 대한 의견을 말해주는 것이 신앙교육을 시키는 부모님의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신앙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전달하려는 것이란 생각을 못해보셨습니까? 외모를 단순히 그냥 자신만의 외모정도로만 알고 있는 자녀들에게 예수님의 마음과 뜻과 입장을 생각하라고 권해주는 것은 자녀를 둔 부모님들의 중요한 교육적 책임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라면 외모도 혼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께 묻고 주님의 뜻을 먼저 따르려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주님과 함께 의논해서 무엇이든 결정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외모 선택에 관여하여 자녀들을 항상 주님의 뜻을 묻는 습관을 갖추도록 만들어 주어야 할 엄중한 책임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특정 동물로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은 저절로 성숙되지 않고 오직 가르침을 받아야 성숙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진 특성 중의 하나입니다. 외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스스로
고칠 때가 그냥
오리라고 확신만 하는 것은 사람을 강아지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강아지는 교육 없이도 저절로 어미개로 자라납니다. 물론 세상 사람의 자녀들은 어느 정도 저절로 정신적으로 성장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세상 사회가 가르쳐서 동일한 부류의 세상 인간으로 성장시켜 주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신앙교육은 절대로 저절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저절로 세상 사람이 될 수는 있어도 저절로 신앙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타고 난 죄의 속성으로 인하여 저절로 선해지고 저절로 거룩한
방향으로 성숙되어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성교육을 통하여 원만한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얻고 신앙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해 주는 것 자체는 교육을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이지 교육은 아닙니다. 누군가 외모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가르쳐주고, 땀과 눈물을 흘리며, 비난과 원망을 들어가면서 까지도 애쓰는 사람이 있어야 예수와 연합된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신자의 외모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외모로 인하여 예수님까지도 함께 판단받기 때문입니다. 즉 입거나 착용하고 있는 본인뿐만 아니라, 본인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까지 함께 판단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중심을 꿰뚫어 보실 수
있는 하나님과는
달리, 사람들은 직접 중심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외모와 들리는 말이나 보이는 행동을 통해 중심을 가늠해 보게 됩니다. 외모가 비정상적일 때는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흠이 있으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판단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나는 남이 나를 어떻게 보던지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단히 굳건한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는 자기밖에 모르는 “영적 이기주의자”입니다. 물론 자기가 불신자들 눈에 어떻게 보이든 상관 안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나로 인하여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온갖 모욕을 다 당하시면서 살이 찢겨지고 하염없이 피가 쏟아지는데도 나 때문에 부끄러움을 참으시고 모욕을 참으시고 아픔을 참으셨던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비정상적인 분으로, 흠이 있는 분으로, 부족한 분으로, 혹은 삐뚤어진 분으로, 정욕을 이기지 못하는 분으로, 이생의 자랑에 매여 있는 분으로, 그냥 세상 사람들 중의 하나로 여겨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불신자와 동류로 취급당하는 것은 스스로 자청한 것이니 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까지 동일하게 취급받게 만드는 것은 결코 그냥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자이시며 주인이 되신 예수의 이름을 책임 질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외모도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예수께 속한 사람답게, 신자답게, 품위 있고 깨끗하게 착용하고 다니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외모는 큰일을 이룰 자질과도 연관되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외모는 그냥 간단하게 지엽말단이라고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작고 소소하게 보이는 일까지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즉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에는 작은 일 큰일이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은 무엇이든 큰일이고, 하나님과 관계된다면 무조건 본질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무엇을 하든 성실과 충성으로 해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작다고 생각되는 일은 대충하고 큰 일만 잘하려고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길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일을 성실히 해야 큰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봐도 작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시작은 미미합니다. 작은 씨에서 시작되어 어린 싹이 나고 조그만 나무로 자라면서 결국은 크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건강도 한꺼번에 비싼 보약을 먹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좋은 음식 적당히 먹고 매일 틈나는 대로 잠깐씩이라도 운동을 함으로 돈으로도 권세로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건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 큰문제의 전조일 때도 많습니다. 열이 나서 머리가 아픈 상태를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해열제로 치료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머리가 아픈 이유는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단순한 감기로 인한 증상일 수도 있고, 심각한 폐질환으로 인한 증상일 수도 있고, 몸 안의 어떤 기관에 염증이 생겼다는
신호일 수도 있고, 뇌에서 발생한 이상 증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 아픈 증상을 감기정도로만 여기고 간과하였다가 나중에 크게 당황하는 일들도 수월찮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청년이 귀에 귀걸이를 착용한 것이나 머리를 빨간색으로 물들인 것들을 작은 지엽적인 문제로 보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자세입니다. 바다에 조그맣게 떠다니는 얼음조각은 사실상 큰 빙산의 한 부분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것에서 큰 덩어리를
볼 수 있고,
지엽적으로 보이는 작은 문제에서 장차 다가올 정말 힘들고 해결하기 어려운 본질적인 난제를 예상해서, 지금부터 그것을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고 씨름할 때, 장차 다가올 큰 어려움을 미리 방지하고 방황하는 일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는 작은 일이 우리들로 하여금 큰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준비시켜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양을 지키고
보호할 책임을 맡겨 주셨고,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물매 던지는 연습을 하게 해 주셨고, 믿음으로 곰과 사자와도 맞서 싸워 물리치는 경험을 하게 해 주신 것이 마침내 큰 승리를 얻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하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특별하고 중요한 일들을 수행할 자질과 능력을 갖추게 만드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크고 귀한 것은 작은 일에 충성함으로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작은 귀걸이 하나라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성실함이 없다면 앞으로 큰일을 맡을 만한 그릇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예상해도 될 것입니다. 이 청년과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명심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큰 것을 우상처럼 바라보고 섬기면서, 작은 것은 무시하고 등한시 할 때,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미물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한 때 그러다가 스스로 그만두는 외모라도 그냥 지나칠 지엽말단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본질의 문제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은 것들은 확실하게 알려주고 확인시켜주고 나아가는 지혜로운 부모님들이 되셔야 합니다.
이상과 같은 외모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가정교육에 있어서 신앙적 법과 원칙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삶의 원칙에 엄격한 부모님들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신앙교육에서 부모님의 역할과 위상, 그리고 어떻게 적용시켜야 되는지를 이어서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1. 서론: 칼럼 요약
▶ 2. 외모는 신앙생활의 한 요소입니다.
▶ 3. 가정과 사회는 다스리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 4.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옳은 주장입니까?
▶ 5.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되어야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 6. 아이들의 기분과 취향을 얼마나 존중해 주어야 합니까?
▶ 7. 결론: 신앙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세 운 돌
1/20/2021 _________________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
Remove not the ancient landmark, which thy fathers have 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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