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woondol Family Mission

     HOME      

 세운돌 안내 

 세운돌 소식 

  세운돌 컬럼  

  질 의 응 답  

  세운돌 간증  

 세운돌 행사  

  세운돌 추천  

  세운돌 선교  

 

 

 

 

 

 

 

 

 

 

 

 

 

 

 

 

 

 

 

 

 

<>
 

    신앙교육법의 기초    
      편견 및 고정관념       
  점검해 보아야 할 문제들  
   교회 교육, 이대로?   
   찬송 예배, 이대로?   
 2세들의 교회가 있습니까?
부모님들이 알아야 할 점들
     언어! 중요합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100% 부모 책임입니다.  
   100% 교회 책임입니다.   
 
    세운돌 가족들의 찬양   
   세운돌 선교 모임 앨범   
  세운돌 선교모임 연 락 처  
 
세운돌 선교모임 가족 게시판
     세운돌 가족 앨범    
 
세운돌 훈련을 받기 원하십니까?

 

 

  ▶  오늘의 시사, 내일의 지도자

 

  ▶ 딜 리 버 러 스  앙 상 블

 

 

 

 
   

 

 

 


    인물을  키우는 세운돌 가정,   가정을 세우는 세운돌 가정선교 모임,   교회를 섬기는 세운돌 인물         


 

가정과 사회는 다스리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가정과 사회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기관들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다스리는 방법과 사회를 다스리는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가정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 방법의 조합을 갈등해결책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첫 번째 제시된 방법이 아버지가 나름대로 원칙을 정하되 원칙을 최소화 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경우 정직과 예의와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과 성실함이라는 네다섯 가지로 한정시키셨습니다. 지켜야 할 원칙들이 너무 광범위하거나 원칙에 너무 엄격하면 마찰이 일어나니까 범위를 좁혀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필수요소들만 원칙들로 정해서 실시할 것을 권한 것입니다. 두 번째 제시된 방법은 이해와 양보입니다. “그것이 정말 원칙에 벗어나고 진리에 벗어나는 것이라면 안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은 이해하고 양보해야 한다.”라고 하심으로 원칙에 해당하지 않는 문제들은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 줌으로 갈등을 해소하면 된다는 취지의 권고를 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일견 논리적으로 합당하고 하자가 없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하나님 없이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가진 한계 때문에 갈등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커질 수도 있는 방법입니다.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하고 나중에 성경이 권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적으로 김동호 목사님의 방법은 공정성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새롭게 발생되거나 증폭 될 수도 있습니다. 아빠가 주체가 되어 원칙을 나름대로 정하고 나름대로 집행하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명시된 기준이 있는 사회법과는 달리 가정의 원칙은 마음과 마음가짐에 관한 임의적(discretionary) 원칙들이 대부분입니다. 김동호 목사님 가정의 경우 예의나 성실함 같은 조항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예의가 바르지 않다거나 성실한지 안 한 지는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에 맡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형태나 정도가 예의가 바른 것인지, 어떤 수준이 되어야 성실한 것인지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 기준을 정확하게 세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주관적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는 사항들입니다. 따라서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하시는 아빠가 자녀들에게 완고한 고집쟁이로, 군림하는 독재자로, 편애하는 자로, 고리타분한 자, 불합리한 자로 여겨질 수도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자녀들이 아빠의 공정성과 공평성에 의문을 제기하면 원칙으로서의 효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부모와 자녀 간과 형제 간의 갈등을 일으키거나 증폭시키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원칙의 최소화도 바람직하지 못한 권고사항입니다. 가정과 사회는 다릅니다. 원칙의 최소화는 사회를 다스리는 방법이지 가정을 다스리는 방법이 아닙니다. 원칙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것이 화목을 위하여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정과 사회가 다르다는 사실이 간과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일반적인 세상 기관이나 단체와는 질적으로 다른 기관입니다. 사회에서의 법은 최소한으로 정하고 나머지는 개인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사회가 시시콜콜 이런저런 법들을 만들어 더하고,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까지 법으로 다스리게 되면 원망과 시비로 시끄러워지거나 자유가 박탈된 공포 사회가 될 것입니다. 법치가 잘 되어있는 민주국가일수록 이웃이나 기관이나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개인의 자유나, 종교나, 언행 심사나, 사생활이나 사적인 문제까지 법으로 통제하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필요에 따라 제정된 큰 틀의 기본적인 법들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자유와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도록 기본 규칙들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부딪히지 않고 원활하게 지낼 수 있게 해 주면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주고, 개인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 줌으로 결과적으로 사회가 번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사회법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다른 종교와 다른 피부색이나 심어지는 언어나 생각이 달라도 합의하여 제정된 일정한 법들을 지키기만 하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서로 부딪히지 않고, 서로 돕고, 열심히 노력하고, 노력한 만큼 거두고,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정은 사회와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가정에서는 다른 사상이나 다른 태도나 다른 종교나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식구들이 서로 화목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하는 사람이 가정 안에 한 명이라도 있으면 화목은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남남처럼 서로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삶만 살아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곳은 더는 가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도 모임도 장소도 공간도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 각자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주장하는 순간 가정은 일반적인 사회적 모임이나 기관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와 양보도 생각과는 다르게 일반적으로 비현실적 갈등 해소 방법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타고난 편향적 사고방식 때문에 이해와 양보로 갈등이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받은 혜택이나 은택을 쉽게 잊어버리는 반면, 자신이 베푼 은혜나 덕행은 오래오래 기억합니다. 꽤 많은 사람이 자신은 남보다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자기중심의 편향적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또한 동일한 이유로 이해와 양보가 많아질수록 한편으로는 불만과 불평이 증가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입니다. 이해와 양보를 주고받는 가운데 심지어는 거의 받기만 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은 받지는 못하고 주기만 해서 손해 본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불만과 불평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주고받으면서, 서로 이해해 주면서, 서로 양보하면서 살면 화목하게 될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계속해서 발생되는 이유는 특정한 개인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고난 불완전함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이해와 양보가 거래로 변질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받아드리는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이해와 양보가 일종의 담보나 거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또는 자신을 좋게 포장하기 위하여 이해와 양보를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순수해야 할 이해와 양보가 밀고 당기는 신경전과 머리싸움의 도구로 전락 되기 쉽습니다. 이처럼 화평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보이는 이해와 양보조차도 이해득실의 수단이 될 수도 있고, 그럴 경우 갈등 해소는커녕 갈등을 더욱더 부추기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나름대로의 원칙으로도, 최소화된 원칙으로도, 그리고 이해와 양보로도, 또는 어떤 또 다른 인본주의적 방법으로도 화목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들의 노력으로 화목함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를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화평을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부터 성경이 권하는 방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칙의 제정과 판단과 집행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겨야 화목할 수 있습니다. 가정을 다스리는 원칙에는 주관적 요소들이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실하라, 순종하라, 참아라, 말을 조심하라, 부지런해라, 욕심부리지 마라, 다른 사람들 먼저 생각하라, 등등은 정말로 꼭 필요한 가정의 원칙들인 동시에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들입니다. 이런 원칙들을 사람이 집행하면서 판단하고 적용시키면 편애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고 아부나 눈속임 또는 섭섭함과 불만과 반항을 유발시킬 소지가 많습니다. 따라서 아빠가 임의대로 원칙을 제정하고 집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정의 원칙으로 택하여 아빠를 포함한 모든 가족이 다 함께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원칙의 공정성과 공평성이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칙의 권위가 존중되고 원칙이 공정하게 집행되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원칙의 통제를 받게 되고, 질서가 잡히고, 질서가 잡힌 곳에 자연스럽게 화목이 깃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방법입니다.

온 가족이 모두 함께 성령의 인도를 받고 따라야 화목하게 됩니다. 성경은 화목이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화목함 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화목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며 살아갈 때, 성령의 열매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지 따로 화목 자체를 추구한다고 해서 화목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가족들이 주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의 뜻대로 언어를 사용하고 주님 뜻대로 행동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 보면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화목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다 함께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심한 갈등 속에 살아가는 가정들도 많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살려는 가족 구성원과 믿음 생활을 적당히 대충대충 하려는 구성원들이 섞여 살면서 갈등을 겪는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자동으로 화목함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하시려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로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4-35)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가정 안에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 사는 경우 화목이 아니라 도리어 불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앙 노선이 일치하지 않으면 역시 불화는 피할 길이 없는 것이고, 동일한 원칙과 원칙준수의 의지가 없다면 화목함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원칙을 축소시키거나 원칙을 배제시키거나 적당한 서로 간의 양보로 원칙을 묻어두고 문제만을 봉합하는 것은 겉으로는 화목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병을 키워 재난을 당하는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모든 구성원이 다 함께 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려고 전심으로 함께 노력할 때,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는 것이고, 하늘나라를 이루면 화목은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 존중되어야 화목할 수 있습니다.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용서해 주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가정이 되어야 화목이 가능해집니다. 이 말은 “내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내가” 양보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상대방을 이해해 주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눔으로 화목을 이루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야지 “내가” 하는 것이 되면 화목은 위선적이거나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떠밀려서 만들어지는 겉보기 행사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성경은 야곱 가정의 갈등과 화목에 대한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시기와 질투와 불신과 반목으로 서로 싸우다가 드디어는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요셉이 그의 가해자 형제들과 다시 화목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5) 요셉이 악행을 저지른 형제들을 자기가 자기의 의지로 용서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들의 악행이 실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부모 형제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뜻에서 허락된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형들의 악행을 도리어 감사하게 받아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해해 주고 용서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나의 의지로 남을 용서해주려고 하면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면 용서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감사함으로도 받아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나 어떤 악조건에서도 화목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천국의 원리가 있는 곳에 화목이 있습니다. 가정은 천국의 원리로 움직이는 곳입니다. 사회에서는 법과 이해득실을 따라 움직이지만, 가정에서는 사랑과 은혜의 법칙으로 움직입니다. 권세가 많을수록 더 많이 섬기는 곳입니다. 약자일수록 더 많은 보호함을 받고, 강자는 약자를 위하여 값없이 수고해주는 곳입니다.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곳입니다. 종교가 다르고 생각과 이상이 다르고 행동 양식이 달라도 삶의 법만 지키면 되는 곳은 사회이지 가정은 아닙니다. 가정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법이나 이해나 양보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하고, 동일한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원칙을 잘 지켜도 식구들 각자의 종교가 다르거나 사상이나 이념이 다르거나 행동 양식이 달라 제각각 자기식대로 행동하고 말하면 가정은 도리어 고통스러운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주의 영광을 위하여 모두 함께 자고 먹고 입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나누고 서로 돕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걱정해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하는 곳이 가정이고,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뭉쳐진 화목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목은 각 가정이나 부부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원칙”들을 잘 지키기 위해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순간순간 노력하며 애쓰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화목을 만들어줍니다. 예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힘든 일도 “마땅히” 하는 자세로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단순히 이해해 주고 양보해 주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이해해 주고 “마땅히” 양보해 주기 때문에 화목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이해해 주고 양보해 주는 것이 대단한 일이고, 훌륭한 일이고, 본받아야 할 일이고, 큰 희생일 수도 있고,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해와 양보는 “해 주는 것”이 되는 순간 가정에서는 도리어 갈등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이해와 양보를 해 주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은혜와 사랑이 사라지고 공로와 공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좌절과 섭섭함 그리고 실망과 갈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화목하려면 진정한 믿음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사랑 위에 세워진 믿음의 가정에서는 “저절로 그리고 마땅히”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이해해 주려고 하는 것이고, 나보다 다른 식구들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저절로 당연히 마땅히” 양보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화목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란 매우 중요한 성경 개념입니다. 혹시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선을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닌데, 왜 선을 행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아 본 일이 있으십니까? 왜 선을 행해야지요? 구원받기 위해서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니 선을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줄 알았으면 구원받은 사람답게 행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값없이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을 행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자격요건을 갖추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부터 확실히 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행해야 할 마음가짐과 행동 양식을 알려주셨던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완벽한 삶을 사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받은 율법을 통하여 부족함을 깨닫게 해 주시고, 생명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나누며 살아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성경이 이와 같은 사실을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초등교사)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4).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접하면서 자기 자신의 죄성과 부족함을 통절히 깨닫고, 더욱 겸손한 자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부모 형제자매들 그리고 그런 이웃들과 함께 성령의 지시를 따라 살게 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곳은 완벽한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용서받은 부족한 자들이 마땅히 서로 도와주고, 마땅히 허물을 가려주고, 마땅히 부족함을 대신 메워주고, 마땅히 짐을 나누어지며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화목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원칙의 범위를 축소시켜 부담을 덜어주려 노력하고, 이해와 양보를 강조한다고 화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가족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다 함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야곱의 아들 요셉처럼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성령의 뜻을 따라 마땅히 이해해 주고, 성령의 뜻을 따라 마땅히 양보하면 자연히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모든 사람들은 화목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화목은 인간들의 노력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1. 서론: 칼럼 요약

▶ 2. 외모는 신앙생활의 한 요소입니다.

▶ 3. 가정과 사회는 다스리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 4.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옳은 주장입니까?

▶ 5.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되어야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 6. 아이들의 기분과 취향을 얼마나 존중해 주어야 합니까?

▶ 7. 결론: 신앙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세  운  돌   1/20/2021 _________________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

Remove not the ancient landmark, which thy fathers have set.

 

       

 

 

 

 


[HOME][가정컬럼][교회컬럼][사회컬럼][생각해봅시다][말씀묵상][질의응답][소식][가정훈련]


 

Copyright (c) 2020  Sewoondol Church  All rights reserved.

sewoondol@sewoondol.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