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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세계에는 지엽말단이란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들이 다 중요합니다. 신자들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지나치는 것이 없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중요하지 않다고 자기 맘대로 결정내리고, 성경에 기록이 없다고 맘 내키는 대로 행하고, 작다고 아무렇게나 하고, 최근의 경향이라서 세류를 따르고, 성경에 구체적 행동지침이 없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세상이 변했다고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은 신자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지금부터 김동호 목사님의 칼럼을 통하여 신자들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두 가지 태도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모든 권면이나 주장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내 경험이나 세상 사람들의 의견에 근거를 둔 주장으로 인하여 영향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아들의 귀걸이 착용을 지엽말단이라고 결론짓고 허락하기로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과정을 통하여 아들의 귀걸이 착용을 지엽말단이라고 결론 지으셨는지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성경적 방법인 기록된 말씀으로나 또는 기도의 응답으로 내려진 결론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글의 내용전개의
흐름이 기도보다는 개인적 경험이나 나름대로의 확신을 근거로 했음을 강하게 암시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칼럼은 기도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습니다. 반면에 서두부터 판단이 개인적 경험에 근거해서 내려진 것임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두에 언급하신 꽁지머리 청년과 빨강머리 청년을 보면서 목사님이 늘 괴로웠었는데, 어느 날 그들이 말씀을 경청하는 태도를 보면서 그 동안 갖고 있었던 외모에 대한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는 경험을 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즉 겉으로 보이는 외모와 신앙중심은 서로 상관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외모가 반듯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 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들로부터 얻은 경험이 아들의 귀걸이 착용을 지엽말단으로 결론을 내리도록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뜻으로도 해석됩니다.
큰 아들의 관점도 목사님의 판단을 공고히 해주는 객관적 증거로 소개 됩니다. “뭐 별로 걱정하실 거 없으세요. 그냥 패션과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큰 아들의 의견을 소개하여 귀걸이 착용이 2000년을 전후한 당시, 남학생의 귀걸이 착용은 세상의 대세였고 별것 아니었다는 목사님의 소견을 첨부하셨습니다. 그때 당시 귀걸이 착용이 그토록 광범위하게 유행했던 일반적 패션 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행이었다는 주관적 확신을 근거로, 세상 사람들 보기에 지엽말단이었고, 따라서 객관적으로도
신자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귀걸이 착용은 지엽말단으로 판단해도 문제가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신 듯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발상의 전환을 통하여 귀걸이 착용이 지엽말단 그 이상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비록 귀걸이 착용이 지엽말단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잘 사용하면 오히려 교인 숫자를 늘리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 좋은 도구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귀를 뚫으시면 동안교회 청년 3만 명은 문제없는데...”라는 큰 아들의 제안에 대하여, “정말 청년이 3만 명 온다면 나는 귀걸이를 할 용의가 있다”는 대답으로 청년들을 많이 모을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로 문제의 귀걸이를 사용하는
역발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지엽말단인 귀걸이 착용과 같은 외모 문제와 씨름하기 보다는 발상을 전환하여 예수 믿게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면 도리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즉 청년의 귀걸이 착용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대신, 목회를 돕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문제가 되기는커녕, 지엽말단을 넘어서, 지엽말단을 뛰어넘는 소중한 전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논리인 것 같습니다.
이상에서 분석해 본 것처럼 종합해서 간단하게 말하면, 귀걸이 착용이 지엽말단으로 분류되게 된 것은 목사님 본인의 경험과 세상의 분위기와 세태의 흐름, 그리고 수적부흥을 중시하는 개인적 목회 철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기도의 응답을 바탕으로 귀걸이 착용이 지엽말단이라고 확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세태의 흐름과 수적증가를 우선시하는 목회 철학을 바탕으로 내려진 결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 목사님께서 귀걸이
착용을 지엽말단으로 분류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바탕을 둔 성서적 주장이 아니라, 사사로운 경험과 추측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 주장이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드리고 따라하시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님들은 언제 어디서나 무슨 말을 하건 무슨 행동을 하던 어떤 판단을 내리던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해야 되고 또한 하나님께 기도부터 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도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것인지 사사로운 개인적인 생각에서 하는 말인지 분별하여 받아드려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믿음과 행함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점입니다. 비유로 말하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분리시키면 안 될 뿐만 아니라 분리시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즉 청년의 믿음과 청년의 행위를 분리시키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행동을 포함한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서 2장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 2:22) 예수 믿는 것과 귀걸이 착용은 한 가지 문제로 보아야지 두 개의 다른 문제들로 보면 안 될 뿐만 아니라 나눌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목사인 것과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목사“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인본주의나 공산주의나 자기 생각을 외치면 목사가 아닌 것입니다. 목사인 것과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두 가지의 다른 것으로 분류하여, 목사는 본질이고, 말씀 전하는 것은 지엽으로 나누게 되면 목사가
아무 말이나 해도 문제가 될 필요도 없고 도리어 교회에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올 수 있는 기회도 생기니 더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예수 믿는 것과 귀걸이 착용을 두 가지의 다른 문제로 보기 때문에 예수 믿은 것은 본질, 예수 믿는 자의 행동인 귀걸이 착용은 지엽말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하나입니다.
믿는 것과 행동이 하나라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에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하나님 앞에 분향하다가 죽음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웃사는 흔들리는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붙잡았다가 목숨을 잃었고, 고린도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합당하지 않게 만찬을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심지어는 죽기도 했다고 사도 바울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문제 때문에 죽는 일까지 벌어졌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행동이 실상은 매우 중요한 심령의 문제였고 믿음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지엽말단이 없습니다. 신자의 모든 언행심사는 곧 본질적인 문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신자의 기본자세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값없이 은혜를 받은 자로서, 또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약속한 자로서,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신자는 누구나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사사로운 소견에 따라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귀걸이 착용에 대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서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 맘에 내키는 대로 하고, 다른 사람이 한다고 그냥 따라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면 안 됩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근거로 그것이 작은 일인지 큰일인지, 지엽인지 본질인지에 대한 판단이 내려졌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귀걸이 착용이 설사 하찮아 보였어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전까지는 덜 중요하다고 단정하지는 말았어야 합니다. 사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성심성의를 다하고 주의를 기울일 줄 알아야 비로소 크고 중요한 일들도 맡아서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큰 것과 작은 것, 또 지엽과 본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세상평가와는 전혀 다릅니다. 작다고 무시하고 지엽말단이라고 하찮게 여기는 태도는 잘못된 자세입니다. 인간들에게는 작아 보이는 두 렙돈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과부가 바친 두 렙돈은 엄청나게 큰 액수라고 하셨습니다. 소자(little one)에게 대접한 냉수 한 그릇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주님이 절대로 잊지 않고 상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작은 소년이 기꺼이 드린 작은 도시락 하나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는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와 예수를 따르는 소수의 무리들을 무시하고 천대하고 죽이고 버렸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소수의 제자들을 통하여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땅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도 크게 보이는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먹지 말라고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먹었던 것과 같은 사소해 보이는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소소해 보이지만 엄청나게 큰 불순종의 사건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작은
일이나 작은 행동도 큰일을 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살피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또 하나님께 기도로 물으며 해 나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지엽말단이 없습니다. 하찮아 보이는 작은 일 하나까지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일은 큰일이고, 아무리 큰일 같아 보여도 자기영광을 위해 했다면 작은 일인 것입니다. 끝 날까지 대소사를 막론하고 언제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뜻대로, 주님이 예비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이와 같이 사는 것이 가장 값지고 귀한 인생입니다.
▶ 1. 서론: 칼럼 요약
▶ 2. 외모는 신앙생활의 한 요소입니다.
▶ 3. 가정과 사회는 다스리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 4.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옳은 주장입니까?
▶ 5.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되어야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 6. 아이들의 기분과 취향을 얼마나 존중해 주어야 합니까?
▶ 7. 결론: 신앙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세 운 돌
1/20/2021 _________________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
Remove not the ancient landmark, which thy fathers have 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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