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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본을 따라야 합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기독교의 초창기부터 가난한 자들이나 약자들은 교회의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재난이나 기근이 닥친
곳에는 언제나 선교사님들과 교인들이 나서서 구제 활동을 해 왔고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한두 번 참석한 것만으로도 어려움을 당했을 때, 온 교우들이 찾아와서 위로해주고 발 벗고 도와주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신앙생활의 작은 한 부분이지 핵심도 아니고 전부는 더욱더 아닙니다. 문제는 기독교를 구제기관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굳건히 믿고 사는 분들이 많고 또한 그것이 사실인 양 말씀하시는
목사님들도 계시고, 그것으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분들도 있어서 이것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대표적으로 김동호 목사님의 “기독교와 사회주의”라는 제목의 새벽 설교를 예로 들어서 어떤 것들이 잘못된 생각인지 분석해보고, 그렇다면 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다른 약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두 가지 문제를 순서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와 사회주의“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김동호 목사님은 예수님의 관심이 특정계층의 사람들에게 집중되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 특정 계층은 고아, 과부, 소자, 외국인, 가난하고 병든 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라고 하면서 “왜 그럴까요? 관심이 있으니까! 왜 관심이 있을까요? 사랑하니까! 자꾸 마음이 쓰이시니까!”라고 묻고 대답하시면서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사회주의적인 성격이 다분히 있습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평등을 늘 강조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나름의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또한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혁명을 통하여 억지로 빼앗기 때문에 안 되고, 자진해서 스스로 불쌍한 자들을 섬기며 돕고 있는 기독교가 나서서 해야 한다는 권고를 해 주셨습니다.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분의 주장 안에는 상당히 심각한 신앙적 진리의 변형이 있기 때문에 어떤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인지를 먼저 찾아 분석하면서 잘못된 부분들이 왜 잘못된 것이고 무엇이 옳은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교회가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병든 자, 소외된 자, 눌린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 바로 잡아야 할 문제점들:
첫째로, “특정 계층”에 관심이 집중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특정계층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집중된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특정계층은 성경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공산주의자들이나 사용하는
사상적 개념이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인과 악인, 신자와 불신자, 교회와 세상을 나누고 분류하셨다는 것은 성경적인 사고이지만,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눌린 자들을 하나로 묶어서 “특정 계층”이라고 ‘처한 환경’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은 성경적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각 사람의 마음상태이지 처한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아나 과부나 가난한 상태 자체가 아니라, 고아나 과부나 가난한 자나 병든 자의 사고방식과 신앙태도와 같은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고아나 과부라는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고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릴만한 그릇이 못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목수 요셉의 아들 중의 하나 정도로 무시하고 하찮게 생각했던 나사렛 동네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눅 4:24-27). 과부나 문둥병자라는 처지만으로는 도우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과부들이나 문둥병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찾지도 않고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이스라엘의 과부들이나 문둥병자들에게는 능력을 베풀어 주지 못하셨던 하나님께서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던 이방인 나아만 장군이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받아들였던 사렙다 과부의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능력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찾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부자냐 가난한 자냐 또는 이스라엘인이냐 아니면 이방인이냐와 같은 외부적 환경이나 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와 아픔에 마음이 쓰이셨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추측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마음을 자꾸 쓰게 만드는 것, 곧 하나님을 안타깝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이 아니라 ‘인간의 죄’입니다. 여기서
죄라는 말은 단순한 도둑질이나 강도질과 같은 악행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려는 인간의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고방식과 미련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 죄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행함으로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가난하고 병들고 눌려 살면서 겪는 아픔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생명의 길을 벗어나서 제멋대로 죽음의 길로 가는 인간들의 잘못된 마음가짐 때문에 괴로워하셨던
것입니다. 실질적으로도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고통 때문에 마음 아파하실 필요는 사실상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먹을 것들을 내려주실 수 있고 기름병에 기름이 가루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않게 하실 수 있고, 어떤 병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 부모는 부족하기 때문에 자녀가 병마나 가난으로 고통받을 때 안타까울 수밖에 없고 어찌할 줄 몰라 정말 마음 아파합니다. 하지만 못 고치실 병이 없고,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괴로워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들이
장차 받아야 할 형벌이 어떤지도 모른 채 자신들의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짓밟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병든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신 것은 그들의 불쌍한 처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 없는 부자들이나 자칭 의인들과는 달리, 스스로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하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에게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려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눅 5:32) 그리고 그때 당시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부르셨을 때, 그 부름에 응한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같은 약자들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과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병과 치유에 대한 관점은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은 병의 원인을 병균의 침입이나 신체의 기능장애나 이상 현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선인이나 악인이나 누구나 다 병에 걸릴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 치유는 약물치료나 수술이나 좋은 음식 섭취와 같은 것으로 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을 수 있다고 대체로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병이나
육체적 환경적 결함은 죄의 결과라는 생각이 확고할 정도로 매우 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보고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누구의 죄로 인하여” 저가 맹인으로 태어났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병에 걸리거나 장애인이 된 것을 죄의 결과로 보았고, 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후에 다시 만났을 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해 주셨고, 중풍병자에게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눅 5:20) 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당시에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은 죄의 용서와 은혜의 선포라고 생각해야 맞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메시지는 누가복음 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어려운 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어려운 자들도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를 충족 시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어려움 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받으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죄의 포로가 된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겠다는 선포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눈먼 자, 눌린 자,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신 것은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불쌍히 여기셔서 상황을 개선시켜
주기 위함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평등을 강조한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가까이하셨던 이유는 그들에게 평등한 세상 나라가 아니라, 천국을 얻게 해 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이 땅에서는 ‘거지로' 살다가 ’거지로' 죽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나사로의 처지를 개선시켜 주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신 그런 나사로에게 하나님은 천국을 유업으로 주셨음을 성경은 이 비유를 통하여 밝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이 땅에 사는 동안 평등하게 살도록 도움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곳에서 살도록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일관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도 바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신 정확한 이유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큰 희생을 치르시면서 모든 인간을 천국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시고 초대하셨는데, 그 귀한 은혜를 받게 된 사람들이 나사로처럼
사회 저변에서 업신여김당하며 힘들게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재물도 있고 명예도 권세도 있었던 사람들은 열심히 땅의 것들을 추구하고 육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을 때, 도리어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했고,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로 영접하고 믿고 따름으로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통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재물을 나누어 주면서 삶의 질을 높여 주려 하셨던
것이 아니었고, 그것보다 차원이 더 높고 귀한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찾으셨고, 결과적으로 가난하고 눌린 자들이 그 엄청난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약 2:5)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을 주시려 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귀한 믿음을 주시고 또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만나주시고 찾아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5)는 말씀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즉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셨던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달해 주셨고, 가난한 자들은 그 복음의 말씀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한 자들을 찾으신 이유는 어떤 것도 의지할 것
없이 도움도 제대로 못 받고 어렵게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던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믿음과 천국이라는 너무도 귀한 선물로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은 재물을 나누어 주고 경제적 평등을 이루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려고 가난한 자들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넷째로, 기독교에는 사회주의적 성격이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사회주의의 실체를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절대로 사회주의자들의 눈으로 가난한 자들을 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이용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겠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소박한 사람들을 의식화시켜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같지 못한 빈털터리로 믿게 만들고, 동시에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느끼게 만들고, 멀쩡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반항적이고 불만족스러운 태도를 갖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가난의 책임을 사회의 병폐와 부자들의 욕심에 떠넘기게 만들고, 모든 사람이 서로 협조하여 공생하도록 해 주기보다는 대립하게 만들고, 가진 자들의 문제점들을
부각시켜 사회적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파괴적 사상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진심으로 도와주고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려는 기독교와 가난한 자들을 말로는 위한다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증오심을 심어주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사회주의가 어떻게 동일한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 사회를 뒤집어엎으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동일한 성격의 관심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논리를 보면 사회주의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문제지 올바른 방법을 사용하면 괜찮을 것이라는 전제가 저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수단과 방법보다도 더 악한 것은 사회주의라는 사상 자체입니다. 이웃의 가난함을 나의 책임으로 여겨야 진심 어린 도움을 줄 수 있고 화평을 줄 수 있지, 이웃의 가난함을 자기가 책임질 생각은 안 하고, 가진 자들이나 사회나 나라나 다른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분열과 투기와 갈등 이외에 무엇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자들의 환심을 사고 그들을 부추겨서 자신들만이 지배하는 세상을 구축하려는 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가난한 자들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희생하여 돕자는 기독교와 가난한 자들을 빌미로 부자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만들고 다수의 순진한 국민을 의식화시키고 조정하면서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여 이용하려는 사회주의는 기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교회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만약 교회도 가난한 자들을 돕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지 않고 밖으로 떠들고 자랑하면서 은근히 교회의 수적 증가를 기대하고 치적과 세를 과시하려고 가난한 자들을 돕고 있다고 선전하고 다닌다면, 즉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교회 자체를 위하여 가난한 자들을 도우려 한다면, 사회주의자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김동호 목사님의 주장 중에서 잘못된 것들을 찾아서 왜 잘못된 것이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가난에 대한 교회의 합당한 역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에 옮겨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먼저 보여주신 본보기를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일단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구별해서 합당한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믿는 형제나
자매가 궁핍함을 겪고 있다면 교우들에게 주어진 책임인 줄 알고 당연히 도와야 할 뿐만 아니라, 도울 수 있는 것이 특권인 줄 믿고 형제를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을 모아놓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3-34)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사랑해야 하고, 궁핍에
처한 믿는 형제나 믿는 자매를 보면 아낌없이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자매의 궁핍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있고, 그래야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즉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세상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드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 일서 3장 17절은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도와주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 주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궁핍함의 문제는 서로 도와주는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돕는 자들에게도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잠언 19장 17절에 기록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위의 구절에서 언급한 “가난한 자”는 모든 가난한 자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은 야곱의 후손에 속한 가족들, 즉 하나님의 나라의 가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가 불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백성들 중의 가난한 자”를 의미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책임지고 궁핍에 처한 자녀들을 먹여주시고 입혀 주시지만, 일단 믿음의 형제나 자매들이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우선적으로 마련해 주셔서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를 갖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궁핍에 처한 자녀들을 직접 도와주실 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손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복을 주시고, 동시에 궁핍에 처한 형제를 도왔던 다른 자녀들에게도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역시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궁핍에 처한 자녀들이나 넉넉한 자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며 모두 복을 받고 모두 풍성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비기독교인에 대하여는 방법을 달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궁핍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신데 그들은 아직 의식주 문제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거나, 또는 거부하거나, 안타깝게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재정적 도움이 아니라 일단 복음부터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의식주 문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책임지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예수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빠가 자녀들의 의식주 문제를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따르는 백성들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의식주 문제를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렇게 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그런 하나님이심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내 백성”이라고
하시면서 애굽에서 구출해내신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전혀 없었던 사막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식과 물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기근이 오기 전에 다른 곳으로 피하여 기근을 면하게 해 주시고 (왕하 8), 평상시에는 햇빛과 비를 때에 맞춰 내려 주셔서 곡식을 자라게 해 주시고 수확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신 11:14), 기근 가운데서도 엘리야 선지자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왕상 17)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필요한 의식주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1-33).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의식주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곧 가난의 해결책도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비기독교인들이 당하고 있는 궁핍에
대한 우선적 해결책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고 가난한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부터 전하는 원칙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그냥 도와주시면 되지 왜 꼭 믿어야 도와주시나?”라는 의문을 가진 분이 계십니까? 그냥은 먹여주시고 입혀주시는 것은 사람에게는 저주나 마찬가지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그냥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 것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모르거나 부인하거나 거부하는데도 도움을 주면 동식물 취급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마 6: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식물에게는 하나님을 몰라도 그냥 먹여주고 입혀주시지만, 인간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아야 할 절대적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고요? 다른 동식물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하나님께 소속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이 세상을 떠난 자들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이라고 일컫는 쓰레기 소각장으로 쓸려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간을 다른 동식물과는 다른 영적 존재로 대우하셔서 일부러라도 그냥 도와주시지는 않으신다는 점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복음전파가 중요한 것이고, 비기독교인들은 복음을 받아드린 후에 궁핍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순서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복음전파를 먼저 해야 합니다. 즉 궁핍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전에 복음부터 전해야 맞는 순서입니다. 궁핍은 복음을 받아드리기에 적합한 환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고난 가운데 있어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삶이 넉넉하고 부자이면서도 예수를 잘 믿기를 바라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현실은 안 그렇습니다. 부자인 상태에서 예수 믿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눅 18:25)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따라오라고 했더니 슬픈 기색을 띠고 가버렸던 부자 청년처럼, 삶이 넉넉하고 어느 정도의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되면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넉넉해짐과
동시에
예수를 떠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기는커녕, 하나님의 계명들을 준수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슬슬 피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아예 환영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오실까 걱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난한
상태가 저주가 아니라 도리어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런 현상이 확실하게 보입니다. 권세를 가진 자들과 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거부하고 핍박했지만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를 주와 구세주로 영접하였고 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김동호 목사님이 발견하신 현상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주로 가난하고 눌리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계셨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김동호 목사님의 추측과는 달리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운 환경을
개선시켜주려 그들에게 가신 것이 아니라, 의지할 곳이 없이 방황하는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다가가셨다는 것이 복음서의 기록입니다. (마 11:5)
일단은 순수하게 재정 지원부터 해야 한다는 논리에 끌려들어 가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다음과 같은 주장하시는 분들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를 모르고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이 교회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을
때,
교회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받게 되고, 그러면 교인들의 초대를 받아들이게 되고, 언젠가는 마음을 열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고, 교회에 출석하면서 말씀을 듣다 보면 결국은 예수 믿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까요? 예수 믿는 과정이 이와 같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쉽고 좋겠습니까!!!! 이것이 생각처럼 진행될까요? 사단은 바보가 아닙니다. 자기가 잡고 있던 사람이 예수께로 가는데 그냥 보고만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기까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을 당하셔야 했고, 많은 사람이 눈물과 땀을 흘리며 애타게 올린 기도와,
기도를
받으신 성령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하심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땀과 눈물의 기도 없이 재정지원만으로는 불신자를 신자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약간의 재정적 도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 쪽 면만 보는 단편적인 단순한 기대입니다. 무상재정지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받는 사람의 기대치에 따라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동시에 부정적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물론 지원금은 무조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하고 또 받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실 그와는 반대인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제공하는 지원금 액수가 받는 사람의 기대치와 같거나 많으면 감사하게 될 것이지만, 기대치에 못 미치게 되는 경우는 도리어 경멸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지원금이 모욕으로 비칠 수도 있어서 지원금을 안 주는 것만도
못한 결과를 낳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재정지원을 하므로 마음을 열게 만들려는 시도는 긍정 효과와 더불어 동시에 역효과도 반드시 각오해야 합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설사 받을 때 감사함으로 받았다 치더라도 감사한 마음이 계속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렘 17:9)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부패해지기 쉽습니다. 지원금을 받기 전의 마음과 지원금을 받은 후의 마음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지원금을 받아 여유가 생기거나
급한 불을 일단 끄게 되면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해지기 쉽고, 심할 때는 더 큰 지원금을 요구하게 될 수도 있고, 혹시 거절당하면 앙심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즉 가난한 비기독교인들에게 주는 재정적 지원금은 효과적이지도 못하고,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이벤트로 끝날 가능성이 많은 것이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손수 보여주신 본보기를 기본 수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먹을 양식 지원을 요청하는 무리를 마주해야 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던
백성들이 먹을 것을 더 지속해서 얻고 싶어서 찾아왔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고 하시면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 6:35)라는 대답으로 백성들의 양식지원 요청을 물리치셨습니다. 먹을 것을 요청하지 말고,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궁핍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교회들에 적용한다면, 아마도 ‘재정지원으로
가난한 자들의 마음을 사려 하지 말라. 재정지원으로 가난한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복음전파로 예수를 전하는 일에 전념하라. 이것만이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해결책이다.’라는 의미의 말씀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수님도 가난부터 해결해 주지 않으시고 복음부터 제시하셨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가난이라는 상태는 복음전파에 최적화된 상태입니다. 교회는 가난부터 해결해 주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복음부터 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로 복음 자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복음전파부터 해야 합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은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불신자들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병들고, 먹을 것이 없고, 물건 살 돈이 없고, 거할 집이 없는 사람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불쌍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드리지 않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달하고 잘못 전달받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정도 불쌍한지 알고 싶으면 마가복음 9장 43~4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죄 가운데 살아가는 부자나 권력자나 세상에서 높임 받는 자로 살다가 지옥으로 가느니 차라리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예수 믿고 영생을
얻는 장애인이 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말씀입니다. 이 땅은 우리들이 잠시 거쳐 지나가는 곳이지 영원히 사는 장소가 아닙니다. 이 땅에 최종 종착지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하시면서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시는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편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적 평등을 이루어 주시려고 노력하신 적이 아예 없었고, 또 지금도 없고,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평등한 유토피아로 만들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누가 불쌍한 사람입니까? 불쌍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눌리고 병든 자가 아니라, 예수를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을 해결해 주려는 교회가 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최우선으로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고, 주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교우들이 힘을 합쳐서 도와줄 때, 교우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교우들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십니다. 물질적 빈곤 해결은 하나님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특별히 안타까워하실 일도 아니고, 마음 아파하실 일도 아닙니다. 얼마든지 해결해 주실 수 있고 또 해결해 주시기 원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인간의
죄악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이 죄악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독생자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모욕까지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빈곤 문제는 인간들끼리의 단순한 나눔으로 해결할 문제도 아니고, 해결할 능력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고 또 해결해 주시려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친히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고, 또한 “복음전파”를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 이미 형제자매가 된 교우들끼리는 서로 사랑을 실천함으로, 또 불신자들을 향해서는 복음의 소식을 들려주어 저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안에 들어오게 해 줌으로 가난과 같은 고난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면 안 됩니다. 사람의 생각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이 땅에서의 가난한 처지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는 좋은 상황일 수 있는 반면, 넉넉하고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은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최악의 상황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가난의 문제에 대처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가난하고 힘든 상황 자체가 가난한 서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었던 것이고, 예수님은 기꺼이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만나주시고 복된 말씀을 전해 주셨던 것입니다. (마 11:5 참조) 결론적으로 말해서 궁핍과 가난의 근본적 해결책은 복음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를 믿지 않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우선 복음을 전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정적 도움은 그들이 예수를 믿은 다음에 주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고,
그렇게 해야 바람직하고 건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참고 문서:
기독교와 사회주의,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연합이 불가능합니다! ▶
______________________세 운 돌 5/13/2021 _________________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
Remove not the ancient landmark, which thy fathers have 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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